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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69주년 이야기

by 슬기정보꿀팁 2021. 11. 19.

9월 15일 오늘은 69년 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입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적화통일을 눈앞에 두던 김일성은 졸지에 만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전쟁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였습니다. 그는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복귀한 직후인 1950년 7월 초에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북한군의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계획과 상륙지점을 연구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상륙작전계획의 연구는 극동군사령부 작전참모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단(JSPOG)이 맡았습니다.

 

합동전략기획단은 7월 22일을 작전개시일(D-day)로 한 ‘블루하츠 작전(Operation Blue Hearts)’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이 계획의 기본개념은 남부전선에서 미 제24·제25사단이 정면에서 반격을 가하고 이와 병행해서 해병연대전투단과 육군부대가 돌격부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함으로써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구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블루하츠 계획은 전선 상황의 악화에 따른 가용 병력의 부족으로 7월10일경에 이르러 계획이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에서 수많은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바 있었던 맥아더 장군은 그 기본구상을 유지하면서 상륙작전계획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블루하츠 계획은 그로부터 2개월 후의 작전계획에 기초가 되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상륙작전 구상은 비밀리에 계속 추진되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상륙지역으로 인천을 강조하였으나, 동시에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연구 검토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 작업을 맡게 된 합동전략기획단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한반도의 모든 해안지역을 검토하였습니다. 합동전략기획단은 7월 23일 상륙 후보지 3곳에 대한 계획안을 수립하였습니다. 이것이 계획 100-B, 계획 100-C, 계획 100-D로 구성된 암호명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 계획이었습니다. 계획 100-B는 서해안의 인천에 상륙하는 것이고, 계획 100-C는 군산에, 계획 100-D는 동해안 주문진 근방에 상륙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계획 100-B에는 인천상륙과 동시에 미 제8군이 낙동강방어선 정면에서 반격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상륙작전계획은 극동군사령부의 관계 참모부서에서 회람된 후 인천상륙 계획이 최종 채택되었습니다. 상륙작전의 대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각 부대의 임무에 관한 세부계획은 조속히 수립되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스미스 소장의 지휘전대와 선견부대 계획 참모들이 8월 22일 미 해군함정 마운트 맥킨리(Mount MacKinley)함상에 전진지휘소를 설치하고 세부 작전계획의 작성에 착수하였습니다. (중략)

 

인천상륙은 9월 15일 새벽 2시에 시작되었으며, 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습니다.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제2단계는 인천 해안의 교두보 확보였습니다. 제1단계 작전을 위해 19척의 선두함대가 미 해군 정보장교 클라크 대위가 밝혀주는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인천항을 향해 전진하였습니다. 새벽 5시경 각 함정이 지시된 위치에 도착한 후 유엔군의 항공기와 함포가 월미도와 인천 내륙지역에 폭격과 포격을 집중하였습니다. 오전 6시 27분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 제3대대 병력과 전차 10대를 실은 함정들이 월미도 해안을 향해 일제히 전진하였습니다. 제3대대는 예정보다 3분이 늦은 오전 6시 33분에 상륙한 후 곧바로 월미도 내륙으로 진출하였습니다. 동굴진지에서 끝까지 버티는 북한군의 저항으로 상륙부대가 월미도를 완전히 탈환한 것은 오전 8시경이었습니다. 이로써 제1단계 상륙작전인 월미도 탈환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습니다. 이날 만조가 다시 시작되는 오후에 접어들면서 적색해안과 청색해안에 상륙할미 해병 제5연대와 해병 제1연대 병력을 태운 함정들이 인천 수로를 따라 서서히 인천항으로 접근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함재기들이 인천을 중심으로 반경 40㎞ 지역의 도로를 맹폭격하고, 함포사격 지원전대가 인천항에 근접하여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습니다. 엄호사격이 진행되는 동안에 미 해병 제5연대 예하 2개 대대와 한국 해병 제1연대 제3대대 그리고 미 해병 제1연대의 돌격부대가 수송함(APA)에서 내려 상륙주정(LCVP)으로 옮겨 탔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 45분에 해병 제5연대의 상륙주정이 적색해안을, 해병 제1연대의 상륙주정이 청색해안을 향하여 각각 별도로 선정된 해상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였습니다. 미 해병 제5연대는 계획된 시간보다 3분이 늦은 오후 5시 33분에 월미도 건너편에 설정된 적색해안으로 상륙하였습니다. 제1대대의 선두 공격부대는 최초 목표인 공동묘지를 상륙 22분 만에 완전히 탈취하였으며, 그 우측의 제2대대 선두 공격부대는 상륙 후 철로 남쪽으로 이동하여 내항부두와 영국영사관이 있는 고지 방향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미 해병 제5연대에 배속된 한국 해병 제1연대 제3대대가 후속하여 상륙하였습니다. 미 해병 제5연대는 이날 자정 무렵에 통제선 확보를 마무리하였다. 그동안 미 해병 제1연대는 송도 부근의 청색해안에 17시 32분에 선두 돌격부대의 상륙 이후 북한군으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1일차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상륙작전 당일 인천으로는 병력 약 1만 5,000명과 차량 1,500대, 군수물자 1,200톤이 양륙되었습니다.

 

미 해병 제1사단의 2개 연대는 다음 날 항공기와 함정의 폭격과 포격 지원 아래 신속히 전진하여 해가 질 무렵에는 상륙지역으로부터 10㎞ 지점까지 진출하여 주요 감제고지들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동안 인천시가지에서는 한국 해병 제1연대가 잔적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9월 16일 아침 한국 해병 제1연대는 인천시가지 중앙을 통과하는 경인선 철도를 기준으로 남쪽지역은 제3대대가, 북쪽지역은 제1대대가 분담하여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소탕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연대는 이날 시내의 주요 공공시설을 장악하고 야간 경비와 순찰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로써 인천에 상륙한 지 24시간 만에 미 해병 제1사단이 해안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인천상륙의 돌격단계는 완료되었습니다.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Oliver P.Smith) 소장은 사단지휘소를 인천시가지 동쪽에 설치하고 이날 오후 6시에 상륙 기동부대사령관 도일(James H. Doyle) 소장으로부터 육상작전의 지휘권을 인수 받았습니다.

 

그리고 해병 제1사단은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을 계속하였습니다. 해병 제1사단을 후속하여 해상에서 대기 중이던 미 제7사단이 9월 17일부터 상륙을 시작하였습니다.